사는 이야기2010.02.11 10:15
K에게.....

너 기억나니 이책?


오늘 낮에 김수영 시인과 신동엽 시인을 비교(?)하면서 두분의 시 세계를 설명한 책을 읽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난거야.
집에 와서 책장을 뒤졌더니 그래 맞아! 바로 이 책이 책장에 꽃여 있더구나.
뽑아서 겉표지를 넘기는 순간 눈에 들어 오는 너의 필체....
누렇게 빛 바랜 종이 위에 남아 있는 78.12.29 ,그리고 영어로 흘려쓴 네 싸인....
대학 이학년 겨울 방학때 네가 나에게 선물한 책이지.
언제나처럼 주머니 사정이 궁한 나는 네게 선물만 받았을 뿐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받기만 했었을거야.
지금 들쳐 보아도 어렵고 난해한 김수영의 시집을 왜 골랐을까?
아무 생각 없이 표지에 실린 쾡한 눈의 남자한테 끌렸거나
아니면 폼생폼사라고 괜히 한번 우쭐거리고픈 지적 허영심이었거나......
그래도 틈만 나면 짬짬이 꺼내 보았어. 보이지? 겉표지 너덜거리는 거..
그 옛날에는 연애편지에 써 먹을 근사한 싯구절 하나 찾아 내려고...,
때로는 너와 보낸 지난 시간들을 반추하기 위해....
이제 와서는 딱히 너와의 지난 시간이라기보다는
내 지난 시절의 청춘이 그리워질때면 오래된 시집의 누렇게 바랜 책장을 뒤적이는게 버릇이 되었어.
지금 생각해 보니 너와 참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일요일, 아무도 없는 학교 복도에서,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으로,
초조하지만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두 소녀의 수다는 끝이 없이 이어지고...
서로를 격려하며 다짐했지. 우리 꼭 행복해지자고.....
그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공유하며 그렇게 힘든 시절을 함께 보냈지.
이제는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 무덤덤해진 사이지만
그래도 너와의 학창시절을 기억하다보면
거기엔 허위와 위선을 모르던 순수한 시절의 우리가 있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음이 가슴 뭉클하다.
김수영 시인의 시 중에서 그래도 이해가 가능한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는 이렇게 시작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자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삼십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군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제 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비켜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그래! 젊은날 불의에 분노할 줄 알던 그 열정은 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내 앞의 이익에 연연해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며 살아 온 세월이 어언 삼십년.
누렇게 바랜 시집을 뒤적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청춘이지만 그 시절 그 마음만은 잊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Posted by 구름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향미..

    구름재님은 여전히,,옛날 그대로 같아요..^^

    2010.02.11 12:0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솔바람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였군요. 언제 봐도 좋군요. 밑바닥을 물끄러미 확인해 가며 그래도 조금은 지금보다는 낫게 살아야겠다고 다짐. 그래도 그 다짐 마저 안하는 것 보다는 나을 거야...하며. 그런데 이거이 거듭 되니 그 옛날 시인이 절절이 엮어낸 시어들까지 아랫목 따뜻~~~한 곳에서 뼈골저림 없이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 켕기네요.

    '괴물의 탄생'을 읽고 있습니다. 이 넘의 세상과 제 인식의 한계는 너무도 소름 끼치는군요.

    2010.02.11 20:4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잠머

    무 문학 소 소녀...$.$
    고 공도리으 로 로망....+_+a;;;

    2010.02.12 00:1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4. 물처럼

    예전부터 알아봤어요. 구름재님의 감수성을^^ 그 안의 예리함도 함께... 설 즐겁게 보내세요.

    2010.02.12 15:0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