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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2010/02/03 18:57
4. '참된' 관념에서 '적합한' 관념으로

  인간의 정신이 서로 다른 본성의 관념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를 데카르트 방식으로 질문해 보자. 우리가 아는 것은 과연 참인가? 거짓인가? 우리는 과연 진리에 대해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가? 어떠한 의심에도 의심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것은 존재하는가?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방식의 질문에 매우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어떠한 의심에도 의심될 수 없고 가장 확실한 것이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확실성에 불과하다. 또한 의심을 통해 무한히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면, 그렇게 의심하는 방법 역시 의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심될 수 있느냐 여부에 따라서 구분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참된 관념과 거짓 관념으로 구분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인식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참과 거짓의 구별이란 실재적 구별이 아니라 다만 이성의 구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정신 속에서 어떤 관념에 대해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관념을 실재적인 원인에 대해 설명하는 관념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사물의 원인 혹은 내적 본질을 설명하는 '적합한(edequate)' 관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적합한 관념은 사물의 특성만을 지시하는 추상 개념이나 보편 개념과 다르다. 무엇보다도 사물의 발생적 원인을 설명하는 실재적 정의로서 규정된다. 이를테면, '원(圓)'에 대한 참된 개념, 혹은 적합한 관념은 무엇인가? 원에 대해 '중심으로부터 원주에 그어진 선이 같은 도형'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실재적 정의가 아니다. 어떠한 원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의 특성만을 지시하는 명목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원의 정의를 이렇게 바꾸고 있다. '한 끝이 고정되고 다른 한 끝이 움직이는 선에 의해 그려지는 도형.' 원에 대한 명목적이고 추상적인 정의가 아니라 실재적이고 발생적인 정의. 그것이 바로 적합한 관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관념들의 대부분은 원인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결과들에 대한 인식이다. 자신이 받아들인 부분적인 결과를 진정한 원인으로 간주하는 것에서 부적합한 관념, 즉 오류가 생겨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오류라고 부르는 것이 단지 관념들의 혼동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인간은 자신의 신체에 자극받은 다양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 그러한 관념들 자체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 우리가 다양한 관념들 각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것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그것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결과이고 무엇이 원인인지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거짓 관념, 혹은 허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동설을 한번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것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동설이 알려지면서 혼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지구가 도는 걸까, 태양이 도는 걸까? 이처럼 두 가지 관념이 동시에 주어질 때, 우리들은 이 가운데 어느 관념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혼동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관념 각각은 그 자체로 아무런 허위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우리 눈에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허위가 아니다. 이 두 관념들 각각을 구분하지 않고 한꺼번에 받아들이면서 그것들을 혼동하는데서 오류가 일어나게 된다. 즉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혼동하면서 "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구 주위를 돈다'고 말하는 경우에만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도깨비'라는 관념은 어떨까? 그것은 단지 허위인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스피노자라면, 우리가 '도깨비'를 상상하는 것 자체에는 어떠한 오류도 없다고 말할 것이다. 오히려 오류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의 원인에 대한 관념을 결핍한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도깨비'라는 것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관념을 갖지 못한 것에 있을 뿐이지, '도깨비'라는 관념 자체에는 어떠한 오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즉 정신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보면 아무런 오류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 또는 정신이 사물을 상상한다고 해서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자신에게 현존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사물에 대해 그 현존을 배제하는 관념이 없다고 고찰될 때만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상상할 때, 그것과 동시에 그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면, 정신은 확실히 상상 능력을 자기 본성의 결점으로 돌리지 않고 도리어 장점으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EⅡ.P17. S)

 그렇다면 여기에서 보다 긴요한 질문은 우리가 사물을 어떤 방식으로 파악하며, 그리고 어떻게 그것의 원인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신체는 사물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파악한다. 우리의 눈에는 태양과 달의 크기가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는 다만 우리의 눈에 그렇게 자극된 것일 뿐이다. 태양은 우리의 눈에 약 200피트 정도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자체는 아무런 오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그저 오류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것의 원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 된다. 즉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참된 원인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또한 우리들은 태양을 볼 때, 태양이 여기서 약 200피트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오류는 그러한 생각 자체에 있지 않고 우리들이 태양을 상상할 때 태양의 참다운 거리와 함께 우리들의 상상의 원인을 모르는데서 성립한다. [....] 우리가 태양의 정확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신체의 변용은 신체 자신이 태양의 자극을 받는 한에서 태양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태양을 그처럼 가깝게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EⅡ. P35. S)

 여기서 스피노자가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신체가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이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신체에 가해진 외적 자극의 관념을 '이미지(image)'라고 부르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인간의 신체에는 무수한 개체들 간의 변용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체 밖에 있는 사물들에 의한 변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변용들은 신체에 '흔적'을 새기는데, 이러한 흔적들에 대한 관념이 바로 '이미지'라는 것이다(EⅡ. P17. S)

 이미지는 일종의 '기억'이기도 하다. 사고로 팔을 잃은 환자들의 경우를 보면, 이들은 곧잘 자신의 팔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면서 심지어 팔의 통증을 호소하기까지 한다. 이는 자신의 신체에 새겨진 팔의 흔적들에 의해서 그런 가상의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험 전날 밤새며 외웠던 각종 공식들은 시험이 끝나면서 쉽게 잊혀지지만, 거의 매일 습관적으로 떠올려야 했던 구구단은 좀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이들 모두가 자신의 신체에 그만큼 '깊게' 혹은 '얕게' 새겨진 흔적들인 것이다. 스피노자가 『에티카』2부에서 구분하고 있는 3가지 인식 가운데 <1종 인식>이란 바로 이러한 '이미지'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적합한 관념에 머물 뿐이다. 그것들은 개체들 간에, 또는 외부 사물로부터의 외적 자극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이로부터 그것들의 참다운 원인을 설명해주는 관념, 즉 적합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이는 인간의 신체가 무수한 개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며, 인간 정신의 본성상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참된 또는 적합한 사고를 형성하는 것이 사유하는 존재의 본성에 속한다면, 우리가 사유하는 존재의 일부라는 것, 즉 어떤 사고는 온전히 우리의 정신을 구성하는 반면, 다른 사고들은 오직 부분적으로만 구성한다는 점에서만 우리 안에 부적합한 관념이 일어난다는 것은 확실하다."(TE,32-33)


Posted by 구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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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졸리운

    내게 위에서 말하는 정신이라고 것이 있는지 그거이 의심스러우니........이래서야 적합이고 부적합이고를 가를 꺼리가 엄따 싶다.

    돌아봐야 '흔적'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에혀.......

    2010/02/03 21:40 [ ADDR : EDIT/ DEL : REPLY ]
  2. 아트걸

    아트앤스터디에서 <근대성 논쟁의 뿌리 :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라는 강의가 7주에 걸쳐 진행됩니다. 관심 있으시면 한 번 둘러 보세요^^
    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03.asp?lessonidx=off_yjKim01

    2010/03/02 18:33 [ ADDR : EDIT/ DEL : REPLY ]
  3.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ㅠ 감사합니다.

    2010/05/10 23:25 [ ADDR : EDIT/ DEL : REPLY ]
  4. 단선

    수고 많으십니다. 공부하는데 많이 도움이 되었네요. 다음 편은 언제 올라오죠? 전문 다 보고싶네요. ㅠㅠ

    2010/05/23 12:3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