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석하던 구리스마스도 지나고 갈길은 멀고 읽을 책은 많고 참 바쁩니다.
저 역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도전하려다 막간에 나스메 소세키를 읽는 중이었는데 스피노자를 옮기다 보니 서양철학의 줄기를 알아야겠다 싶어 전에 사다 던져 둔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상 하)를 읽다가 졸다가 하는중입니다 -.-;;; (쳇 먼 부귀영화를 보겠다고ㅜ.ㅜ)
암튼 이왕 시각한거니까 끝은 보아야죠
2. 신체와 정신은 평행하다
데카르트가 가져온 난점은 보다 중요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정신과 신체가 두 개의 독립된 실체로 분리되어 있다면, 인식하는 '주체'(정신)와 인식의 '객체'(신체)가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었던 데카르트는 이 문제에서도 동일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주체와 객체, 관념과 대상은 어떻게 서로를 보증하는가? 정신 안에 갖는 '솨고'라는 관념과 실제로도 존재하는 '사과'가 일치한다는 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만일 관념과 대상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로부터 결국 정신과 신체가 아닌, 제 3의 초월적 근거를 개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에게 긴급 구조요청을 하게 된다. 신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따라서 인간에게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형상, 즉 이성적 능력이 있다. 신이 최고로 완전한 존재라면, 신이 인간에게 부영한 이성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것이 아니겠는가? 최고로 완전한 존재인 신은 결코 인간이 기만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의 노리적 난점을 일거에 해결해주기 위해 신의 존재가 '요청'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부터 살펴보게 될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데카르트의 이러한 난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는 관념과 대상을 일치시킬 필요가 전혀 없었고, 제 3의 초월적 근거를 개입시킬 필요도 없었다.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애초부터 동일한 변용의 두가지 표현, 즉 신이 두가지 속성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인간에게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를 두 가지 독립된 실체로 본 것과는 달리, 스피노자에게서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두 가지 속성들로 표현된 양태를 의미했다. 즉 동일한 변용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표현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는 정신과 신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지 않다.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서로 동등하며 평행하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그 유명한 '평행론'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을 경우, 뜨거워서 아픈 것은 손이지 손에 대한 관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뜨거운 물에 대한 관념은 결코 뜨겁지 않으며 손을 담글 수도 없다. '관념'과 '사물'은 서로 다른 속성의 양태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으며, 설탕이라는 관념은 달지 않다.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관념을 사물에 대응시켜 일치시키거나, 사물응 관념에 대응시켜 일치시키는 것 모두가 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사물과 관념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우리의 정신이 갖는 관념은 우리 신체에 일어난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우리가 자신의 신체, 자신의 정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관념들을 통해서다. 신체와 정신이 서로에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체에 일어나는 변용에 따라, 즉 신체의 변용에 상응하여 정신은 이에 대한 관념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동일한 변용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표현이므로, 이들은 동일한 질서와 연결에 따라 진행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관념의 질서와 연결은 사물의 질서와 연결과 동일하다"(E Ⅱ.P7)고 말했던 것이다. 손이 뜨겁다고 느끼게 된 원인은 뜨거운 물이며, 손이 뜨겁다는 관념의 원인은 뜨거운 물에 대한 관념이다. 빌딩 붕괴의 원인이 비행기라면, 빌딩 붕괴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비행기에 대한 관념이다. 사물들은 자신의 질서와 연결에 따라 이어지며, 관념들도 역시 자신들의 질서와 연결에 따라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정신과 신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더 우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존재가 서로 다른 방식(사유와 연장)으로 표현된 것일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각의 속성들에 대해 그 우위를 말할 수 없고 각기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이 능동적일수록 그의 신체는 능동적이게 되며, 신체가 능동적일수록 그의 정신은 능동적이게 된다. 유능한 신체일수록 그만큼 유능한 정신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저 역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도전하려다 막간에 나스메 소세키를 읽는 중이었는데 스피노자를 옮기다 보니 서양철학의 줄기를 알아야겠다 싶어 전에 사다 던져 둔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상 하)를 읽다가 졸다가 하는중입니다 -.-;;; (쳇 먼 부귀영화를 보겠다고ㅜ.ㅜ)
암튼 이왕 시각한거니까 끝은 보아야죠
2. 신체와 정신은 평행하다
데카르트가 가져온 난점은 보다 중요한 문제를 야기시킨다. 정신과 신체가 두 개의 독립된 실체로 분리되어 있다면, 인식하는 '주체'(정신)와 인식의 '객체'(신체)가 서로 분리되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었던 데카르트는 이 문제에서도 동일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주체와 객체, 관념과 대상은 어떻게 서로를 보증하는가? 정신 안에 갖는 '솨고'라는 관념과 실제로도 존재하는 '사과'가 일치한다는 것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만일 관념과 대상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로부터 결국 정신과 신체가 아닌, 제 3의 초월적 근거를 개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에게 긴급 구조요청을 하게 된다. 신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따라서 인간에게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형상, 즉 이성적 능력이 있다. 신이 최고로 완전한 존재라면, 신이 인간에게 부영한 이성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것이 아니겠는가? 최고로 완전한 존재인 신은 결코 인간이 기만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의 노리적 난점을 일거에 해결해주기 위해 신의 존재가 '요청'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부터 살펴보게 될 스피노자의 '평행론'은 데카르트의 이러한 난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는 관념과 대상을 일치시킬 필요가 전혀 없었고, 제 3의 초월적 근거를 개입시킬 필요도 없었다.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애초부터 동일한 변용의 두가지 표현, 즉 신이 두가지 속성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인간에게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정신과 신체를 두 가지 독립된 실체로 본 것과는 달리, 스피노자에게서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두 가지 속성들로 표현된 양태를 의미했다. 즉 동일한 변용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표현이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는 정신과 신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지 않다. 인간의 정신과 신체는 서로 동등하며 평행하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그 유명한 '평행론'이다.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된 실체는 동일한 실체이며, 그것은 때로는 이런 속성으로 그리고 때로는 저런 속성으로 파악된다. 또한 연장의 양태와 이 양태의 관념은 동일한 것이며, 그것은 단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E Ⅱ. P7. S)
이를테면, 우리가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갔을 경우, 뜨거워서 아픈 것은 손이지 손에 대한 관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뜨거운 물에 대한 관념은 결코 뜨겁지 않으며 손을 담글 수도 없다. '관념'과 '사물'은 서로 다른 속성의 양태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원이라는 관념은 둥글지 않으며, 설탕이라는 관념은 달지 않다.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관념을 사물에 대응시켜 일치시키거나, 사물응 관념에 대응시켜 일치시키는 것 모두가 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사물과 관념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우리의 정신이 갖는 관념은 우리 신체에 일어난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우리가 자신의 신체, 자신의 정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관념들을 통해서다. 신체와 정신이 서로에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체에 일어나는 변용에 따라, 즉 신체의 변용에 상응하여 정신은 이에 대한 관념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동일한 변용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표현이므로, 이들은 동일한 질서와 연결에 따라 진행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관념의 질서와 연결은 사물의 질서와 연결과 동일하다"(E Ⅱ.P7)고 말했던 것이다. 손이 뜨겁다고 느끼게 된 원인은 뜨거운 물이며, 손이 뜨겁다는 관념의 원인은 뜨거운 물에 대한 관념이다. 빌딩 붕괴의 원인이 비행기라면, 빌딩 붕괴에 대한 관념의 원인은 비행기에 대한 관념이다. 사물들은 자신의 질서와 연결에 따라 이어지며, 관념들도 역시 자신들의 질서와 연결에 따라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정신과 신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더 우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존재가 서로 다른 방식(사유와 연장)으로 표현된 것일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각의 속성들에 대해 그 우위를 말할 수 없고 각기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이 능동적일수록 그의 신체는 능동적이게 되며, 신체가 능동적일수록 그의 정신은 능동적이게 된다. 유능한 신체일수록 그만큼 유능한 정신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즉 어떤 신체가 동시에 많은 작용을 하거나 많은 작용을 받는데 다른 신체보다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그것의 정신도 역시 동시에 지각하는데 다른 정신보다 더 유능하다. 그리고 어떤 신체의 활동이 그 신체에만 의존하는 것이 많고 다른 신체들(또는 사물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의 정신은 뚜렷하게 인식하는데 그만큼 더 유능하다."(EⅢ.P1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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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데카르트 역시 어렵습니다.. 그나마 쉽다는 카피에 속아서! 소피의 세계라는 철학입문서에 도전했다가 금세 무릎꿇었던 아픈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머리가 맑고 순수했던 십몇년 전에 불교에 심취했을 때 불교철학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었던 것 같았는데 말이에요~~~^^
2009/12/29 09:44 [ ADDR : EDIT/ DEL : REPLY ]육체와 정신을 별개의 속성을 가진 독립된 것으로 보든 동일한 존재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든 '둘'로 나눈다는 점에서는 '구도' 상으로는 이 둘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2009/12/29 14:50 [ ADDR : EDIT/ DEL : REPLY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가 적당한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스승과 예언자, 선지자들이 육체와 정신(또는 세속생활과 영적 생활)은 다른 것(분리 가능한 것이며 또 당연히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라 가르침으로써 우리 인간들은 육체는 정신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게되고 정신은 육체를 탓할 수 있게 되어(세속 생활은 아주 세속적으로 영적 생활은 그와 동 떨어지게 아주 '성스럽게..ㅜㅜ))......이로써 육신은 육신으로서 만족하고 마음은 마음대로 평안을 얻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의심을 해본다.
그건 그렇고.....동양에서 최고의 경지로 치는 '무념무상'은 데카르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도가 되는데.......이러면 서양은 '존재'를 향하여 나가려 하고 동양은 '존재'를 벗어나려 했다고 무식하게 마무리 해버려도 되나?^^
구름재님,,철학책 읽으려고 너무 수고하지 마세요~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죠 ㅋ~
2009/12/30 16:31 [ ADDR : EDIT/ DEL : REPLY ]졸리운님..멋지네요 ^^
신영복선생님이 쓴 글이 생각나네요. 서양철학은 개인(존재)를 중요시하고, 동양철학은 관계를 중요시한다고.
존재와 개인을 중요시하면 허무주의로 연결되고(그래서 신이 필요한 건지..), 관계를 중요시하면 시대와 개성,자유가
결박당하는 뭐,,그런 복잡함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린 그저,,옛 사상가들의 글이나 훑어보며 걍 즐기는거죠..^^
책 읽을때 졸립긴 해도 행복한 순간도 있죠^^ 역사책을 좋아하는데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일종의 역사책이라 재미있기도 해요^^ 향미님은 역시 전공이 철학이라 내공이 상당하시네요
2009/12/30 19:01 [ ADDR : EDIT/ DEL ]